조울병과 창조적 기질
요약
예술가 또는 창조적 업적을 보인 유명인 중에서 조울병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과거 여러 문헌에서 창조성과 정신과적 질환의 관련성이 시사되었으며, 이는 현대의 다양한 연구들에서도 창조적 직업군에서 조울병 유병률이 높은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조울병 자체의 특징, 내재된 기질-성격적 특성, 조울병의 경험 등이 이러한 관련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울병의 치료 약물에 의한 일부 부작용이 간혹 창조성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으나, 적절한 치료는 창조성의 안정적 발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론
우리는 역사, 그리고 현실에서 일반적 사고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예술적, 학술적 혹은 기술적 업적을 이루어낸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이러한 유명인 중 정신질환을 겪었다거나,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마감했다는 일화를 가진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창조성은 정신건강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예술의 여신인 뮤즈에게 광기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를 광기와 연관해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저명한 창조적인 인물들이 종종 정신장애를 앓았으며, 창조성이 몇몇 특정 정신건강의학적 질환에서 높게 나타난다는 시각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위대한 창의적인 업적이 조울병과 관련이 있었을까? 혹시 조울병이 창의성을 높여주는 병은 아닐까? 혹은 창의성이 풍부하면 조울병에 걸릴 위험이 높은 건 아닐까?’ 등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여왔다. 이에 이 글에서는 ‘조울병과 창조적 기질’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본론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널리 사용되고 현대 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특성으로 여겨지지만,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개념이다. 객관적으로 창조성은 창조적 성과의 여부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많은 창조적 인물의 업적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 성과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현대에는 참신함과 고유함이 창조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실용성과 어느 정도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새로운 해법을 개발해 내는 것이 창의성이라는 정의도 그럴듯하지만, 창의성의 발휘가 꼭 실용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미학적인 면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 창조적 사고의 핵심은 새롭고 다양한 해법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대안적이고 기존 체계를 벗어난 생각을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지능지수와 같이 질문에 한 가지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평가하는 방법으로는 창조성을 평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창조적 사고는, 개념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관계가 있는 여러 요소 들을 전형적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유연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조울병과 창조적인 직업
Andreason과 Canter는 조울병의 증상에 대한 구조화된 면담과 질문을 사용하여 창조성과 기분장애, 특히 조울병 간에 명확한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아이오와 대학의 저술가 워크숍에서 창조적인 일류 작가 30명 가운데 조울병(1형 또는 2형 양극성 장애)에 해당하는 비율은 무려 43%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일반 대조군의 4배에 해당하였다. 특히 2형 양극성 장애가 30%로, 1형 양극성 장애(13%)보다 더욱 흔했다. 47명의 뛰어난 작가와 화가를 조사한 다른 연구에서는, 38%가 기분장애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특히 시인은 17%가 조증으로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는 일반 인구에서 조증의 평생 유병률이 1%에 불과하다는 점에 비춰보면 무척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가, 시인, 극작가, 화가 등에서는 기분의 변동이 빈번하였지만, 창조성의 발휘가 가장 적은 전기 작가는 일반인과 가장 비슷한 특성을 보였다. 또한 Ludwig는 59명의 여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DSM-III 기분장애 진단 기준을 질문지와 면담을 통해 조사한 결과, 작가 집단은 우울증(56%)과 조증(19%)의 비율이 비작가 대조군 집단(우울증 14%, 조증 2%)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고 하였다. 또한 비교적 최근의 연구로 Tremblay 등은 미국의 대규모 정신질환 유병률 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조울병 환자들이‘예술적’인 직업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서 조울병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비교적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조울병과 창조적 활동
조울병은 직업 외에도 일상생활에서의 창조적 활동이나 취미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Santosa 등은 관해된 조울병 환자 49명과 주요우울장애 환자 25명, 47명의 건강한 대조군, 32명의 창조적 대조군을 대상으로 창조성을 비교한 결과, 조울병 환자군과 창조적 대조군이 건강한 대조군에 비해 창조성을 평가하기 위한 척도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조울병은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즉 가족 중에 조울병 환자가 있는 경우 조울병이 발생할 위험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창조성도 조울병과 동시에 유전적 영향을 받는가에 대한 연구도 시행된 바 있다. 한 연구에서는 조울병이나 순환성 기분장애 환자의 가까운 가족은 조울병의 유전성이 없는 대조군에 비해서 창조성 평가 척도 점수가 높았고, 다른 연구에서도 조울병 환자의 자녀는 창조성이 높았다. 이것은 조울병 소인이 일상생활에서의 창조성과 연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울병의 중증도와 창조성
Akiskal 등에 의하면 가벼운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로 진단된 환자군에서는 8%가 매우 창조적이라고 평가되었지만, 그에 비해 1형 조울병, 조현병, 주요우울장애 집단에서는 1% 미만이 이에 해당하였다. 그는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에서, 음악가들은 심한 조울병에 해당하기보다는 조증 및 순환성 기질 면에서 더욱 높은 점수를 받았다. 2005년의 다른 연구에서는 조울병으로 통원치료 중인 예술가 집단의 43%가 순환성 기분장애에 해당되며, 이는 조울병으로 통원치료 중인 일반인에서보다 4배나 높았다. 또한 전술한 Andreasen의 연구에서도, 작가 집단에서의 2형 양극성장애가 1형 보다 더욱 흔하여, 경한 정도의 조울병이 더욱 창조적인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조울병 중에서 경조증 수준이라면 자신감과 풍부한 연상이 적절히 표출되어 목적지향적인 창조적 활동으로 발전이 가능할 수 있지만, 증상이 심해져 완전한 조증 상태가 되면 그 증상 자체의 심각함 때문에 오히려 창조성이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울병과 창조성의 연관성
첫째로 조울병 자체의 특징이 창조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조울병을 앓은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한 시기와 그때의 기분 삽화를 대조해보면, 경조증과 조증삽화 시기인 경우가 많다. 이 시기에는 생각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 내용과 연상작용이 증가하며, 생각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 조증 환자에서는 감각, 생각, 영상 같은 것들이 섞여서 나타나는 조합적 생각이 증가하고, 다양한 대상들을 한 가지의 모호한 개념으로 합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조증 기간 동안에 일반적인 반응은 감소하지만 특이한 연상 단어는 3배나 더 많이 말했으며, 경조증 상태에서는 웩슬러 성인용 지능검사의 점수는 높아지고, 고양된 기분이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연관이 있다는 결과 등이 보고되었다.
둘째로는 조울병과 연관된 기질-성격 특성이 작용할 수 있다. 예술적인 직업 선택과 연관된 성격 특성을 조사한 29개의 연구를 분석한 결과에서는 ‘충동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충동성은 여러 가지 제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한 연구에서 창의적인 하버드 대학생은 덜 창의적인 학생에 비해서 억제성이 낮았으며, 이는 충동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조울병에서는 이러한 충동성이 증가되어 있으며, 이는 조증 기간 동안뿐만 아니라 관해 상태(증상이 거의 없이 일정 기간 이상 안정되고 있는 상태)인 경우에도 지속된다. 또한 창의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를 뜻하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 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울병, 특히 조증 위험과도 연관이 있다. 즉 조울병 환자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기질-성격 특성이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여겨진다.
셋째로는 조울병을 앓은 경험에 의한 영향이다. 기분장애를 앓은 작가 들 중에는 자신의 창작을 자신의 질병 경험, 질병으로 인한 고통, 시련으로부터 끄집어낸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기나긴 우울증의 충격과 고통을 묘사하고 어떻게 자신이 이에 대처했으며, 이 경험을 어떻게 작품에 표현했는지에 대해 기술했다. 한편 경조증 상태에서는 대인관계의 변화를 겪곤 하는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늘어나며, 열정적인 때론 파괴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예술가들은 삶에 대한 다른 전망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약한 우울증은 이런 열정을 잠재우고 경조증 시기의 경험을 조용히 뒤돌아보며 냉철히 정리하게 해줄 수도 있다.
조울병 치료가 창조성에 미치는 영향
조울병의 핵심적인 치료는 약물치료이다. 만약 약물치료가 창조성을 저해한다면 창조성을 위야 약물 치료를 받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실제 한 연구에 의하면 조울병을 앓고 있는 예술인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는 것이 알려지면 대중의 인기가 떨어지고, 약물치료가 창조성을 방해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일반 환자 들에 비해 치료를 덜 받고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심한 조증이나 우울삽화는 창조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울병을 앓았던 미국의 위대한 시인 Robert Lowell에 대한 일대기 연구를 살펴보면 그가 lithium을 복용하면서 창작 활동이 호전되는 명확한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lithium을 복용 중인 24명의 예술가의 생산성과 작품의 질에 관해 조사한 연구에서는 12명(50%)은 lithium 치료에 의해 자신이 창작 활동이 좋아졌다고 하였고, 6명(25%)은 변동이 없다고 하였으며, 나머지 6명(25%)만이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항정신병약물의 경우에는 아직 연구가 부족하지만 진정 효과가 덜한 항정신병약물과 dopamine 길항 효과가 가장 적은 비정형 항정신병약물이 정형 항정신병약물에 비해 창조성과 동기 측면에서 더욱 유리할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창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울병 환자의 경우 이러한 약물 특성을 고려해 약물 선택과 용량 조절을 해야 한다.
결론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조울병과 연관된 창조성은 가벼운 정도의 조증 증상(경조증, 순환성 기분장애)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서, 그리고 조증 또는 경조증 삽화를 경험한 적이 없는 조울병 환자의 가족 구성원에게서 가장 흔히 나타난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경조증과 창의성이 공유하는 인지적 특성들과 기질-성격 특성들, 그리고 질병 경험 자체가 조울병에서의 창의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치료적 측면에서 창의성이 요구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조울병 환자의 경우 창의성이 저하된다는 등의 이유로 약물 복용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기분삽화로 인해 창의적인 성취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의성을 꾸준히 발휘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Andreason NC, Canter A. The creativity writer: Psychiatric symptoms and family history. Compr Psychiatry 1974;15:123-131.
Goodwin FK, Jamison KR. Manic-Depressive Illness: Bipolar Disorders and Recurrent Depression, 2nd E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2007.
Ludwig AM. Mental illness and creative activity in female writers. Am J Psychiatry 1994;151:1650-1656.
Tremblay CH, Grosskopf S, Yang K. Brainstorm: Occupational choice, bipolar illness and creativity. Econ Hum Biol 2010;8:233-241.
Santosa CM, Strong CM, Nowakowska C, et al. Enhanced creativity in bipolar disorder patients: A controlled study. J Affect Disord 2007;100:31-39.
Akiskal HS, Akiskal K. Reassessing the prevalence of bipolar disorders: clinical significance and artistic creativity. Psychiatr Psychobiol 1988;3(S1):29s-36s.